내꺼내/글싸기

재도전

가랑비 2021. 1. 25. 12:31

  나는 꿈이 컸다. 이상이 높았다. 이상의 '날개'처럼 이상을 상상하면 날개가 돋는 듯 어딘가 간지러웠지만 나는 날 수 없으며, 그 밑은 낭떠러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근데 지금은 이상의 소설 속 주인공 또한 낭떠러지로 떨어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재도약을 하겠다는 이상을 꿈꾸며 간지러움을 느꼈던 것이라 생각한다. 흥미진진하고 멋진 상상을 할 때 느끼는 저릿하고 짜릿한 그 감정이 신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간지러움도 있는 것 같다. 알고 보면 겨드랑이가 아니라 가슴팍 어딘가에서 느꼈을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해 고민했고 그만큼 나의 좌절은 컸다. 현실은 많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그렇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는 그걸 현실화할 재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 중에 그 이상을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를 위해준답시고 해주는 말은 나중에 일단 먹고사는 거부터 잘 해결해보자는 것이었다. 근데 웃긴 건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는 상태였다.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뿐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선 공부만이 살 길이라 길래 다른 욕구를 잘라냈다. 그렇게 나는 현실에 안주하고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다고 진짜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 다시 말하자면 성장이 멈춰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공부라도 했으면 참 좋을 텐데, 정말 불쌍하게도 나는 반항도 심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격으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그나마 의지가 있었던 시기는 대입시험 수험생활 때가 전부였다. 그때마저도 지금 생각해보면 풍월 읊는 수준이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한창 때는 공부하기를 죽도록 싫어했던 것 같다. 공부를 정말 더럽게 안 했다. 나는 반항이 심했던 만큼 고집도 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이 좁쌀 같은 작은 변화 또한 고집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의문들을 놓치지 않고 지금껏 가져온 걸 보면 감탄할 만하다. 그 덕에 조금씩 실마리를 얻어가며 나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공부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과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아이를 교육할 만한 더 나은 방법이 있었겠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다. 아마 이것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자녀를 교육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최근 들어서는 지금 있지도 않고 불확실한 미래인 자녀를 교육할 것이 아니라, '나를 교육하는 것'이었던 것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조금 늦게 깨닫긴 했지만 공부만이 살 길이다라는 말이 정말 나를 위해준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만약 과거에 다른 상황이었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찾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쓰레기 통에 향수 뿌릴 게 아니라 쓰레기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을 인식은 했는데 여전히 안 잡히는 것을 보고 원인을 찾았던 게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다행인 것 중에 또 하나가 내 탓으로 끝내기보다 문제를 인식하고 원인을 찾아서 해결책을 마련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이제야 답을 내리고 한 걸음 나아가 보려고 한다. 

  그렇게 헤매고 헤매다가 문득 도착한 곳을 보니 나는 그냥 좀 더 나은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몸에 지닌 채로 말이다. 자신감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게 꿈을 물어본다면, 나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면서 내가 열정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게 현재로서 가장 적절한 절충안이다. 이 절충안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는 이상을 이뤄내기 위해 필수조건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나'다. 내가 준비돼야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부족한 부분들을 더 길러내야 한다. 어디가 부족한 지 보이니 비교적 빠르게 해결책도 보인다. 어쩌면 내 삶을 살아가는 데 노하우가 쌓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상을 품기 시작했다. 몸이 따듯해짐을 느낀다. 세포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게 느껴진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겠다. 다시 말해서, 사는 이유를 알겠다 이 말이다. 상하좌우에 앞뒤로 넘어져서 코 깨져도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하고 지금은 이 짜릿함을 좀 즐기고 싶다. 그동안 너무 과하게 움츠려서 힘들게 살았다. 꿈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었다. 한 번 더 날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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