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풍습이 몇 가지 남아서 아직 살아있는 것 중에 하나가 나이와 존댓말인 것 같다. 한국에서, 현대에 살면서 느끼는 나이에 대한 경험과 생각이 새해 맞으면서 새삼 다시 떠오른다. 누구나 다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생각들일 것이다. 나는 한 번 가졌던 재밌는 생각은 속 깊이 저장돼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계속 꺼내지면서 버려지는 것도 있지만 개발되는 것도 많다. 개발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이'인 것 같다. 새해에는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꼭 나이에 걸맞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고등학생 때 즈음부터 나는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으로 변하는 것이 없다고 느꼈다. 또한 보다 어려도 보다 뛰어난 점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멋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떤 캠프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이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존댓말은 흔히 나이 많은 분에게 높여 부르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단순히 나이만 가지고 존댓말을 요구하는 것을 하지 않기로 했다. 높게 살 만한 부분이 전혀 없는데 높여 부르기를 바라는 것이 억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하대하는 것 또한 안 하기로 했다. 친근함의 표시로 서로 말을 놓는 것은 괜찮다. 그래도 가능하면 격식을 갖춰 표현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낫다고 생각한다.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는 경우라면 나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편하다.
불치하문. 아랫사람이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이라는 뜻으로 사전에 나와있다. 개인적으로 아랫사람 혹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조선시대 때 높은 신분이라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나이뿐인 것 같다. 지금 시대에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고 인식한다면 딱 알맞다. 신분이 있었다면 신분에 걸맞게 모르는 것이 없었어야 했겠지만, 현대처럼 다양한 분야와 상상 초월하는 깊이를 보면 세상에 모든 지식을 한 사람이 가질 수 없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다. 내 관심분야 외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이 더 잘 알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당연히 모르는 게 맞다. 그렇게 각자의 분야에 집중해 발전시켜 나가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융성해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르신을 공경하라는 말이 있다. 이쯤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나이만 가지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붙일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이가 가져다주는 경험치를 무시할 수 없다. 나이에 걸맞은 또는 그것을 넘어서는 내면이나 업적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 인정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나이대에 기대하는 바를 가지고 '어르신'을 마주했을 때,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에도 높여보려고 한다. 반면교사라는 참 매력적인 단어가 생각나게 된다. 또한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도 있다.
살면서 스쳐 지나가듯 하는 말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와 나이 많이 먹었다.', '늙었네.' 등 나이에 관련된 말이다. 나도 새삼 내 나이를 보면서 까마득해 보였던 숫자가 내 앞에 있으니 어색할 때가 있다.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땐 분명 빨리 늙고 싶어 했다. 빨리 수염이 났으면 했다. 어리다고 무시당하는 게 싫었을까. 수염이 멋져 보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얼른 벗어나고 싶은 느낌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스무 살을 지나면서 한 해가 갈수록 '와 벌써?'라는 생각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내가 기대했던 20대는 뭔가 이룬 것이 있을 것 같았나 보다. 다행히 20대 중반을 지날 즈음부터는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에 기뻐할 줄 알게 됐다. 특히 내면의 성장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외부적인 요인에 괜히 기죽지 않기로 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자연스레 나의 내면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스무 살이 된 것처럼 기대감을 가지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게 조금씩 바뀌어 나가기로 했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남에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래서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일반적인 룰을 따라 행동하는 편이다. 천천히 뜻이 맞으면 좀 더 잘 지내는 기회가 생길 뿐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라 나의 어떤 점을 보고 높이 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높임 받는 게 멋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높임 받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정받는 정도의 느낌이 딱 적당하다. 비록 나이에 맞게 요구되는 사람이 되는 것도 벅차지만, 나는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