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교육학의 재건

동양학문과 서양학문

가랑비 2026. 3. 13. 14:27

제 1부 성찰-제 1장 학문의 길

1.1.1 고유한 세계

구학문(동양학문)과 신학문(서양학문)의 역사적 전통이나 본질의 차이를 간단하게 지적할 수는 없지만 구학문은 성인을 본받아 사람의 살 도리를 찾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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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서 신학문은 그 훌륭한 인간됨의 국면을 더 나은 인식이라는 범위로 좀 더 한정시킨다. 
각주 1) 서양에서는 학문을 예술이나 도덕과 대비하는 방식으로 규정하여 왔다. 예술은 미를 추구하고, 도덕은 선을 추구하는 데 비해서 학문은 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_p24,25

  동양학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지만, 살아오는 과정에서 접하게 된 것이 있을 뿐이다. 서양학문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오히려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은 서양학문 쪽이었겠다는 구분이 생긴다. 이 구분이 언급된 문장에서 된다. 동양학문이 성인을 본받아 사람의 살 도리를 찾으려 했다라니. 마치 성경의 예수를 본받아 사는 것과 같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양의 것이긴 하나 종교와 유사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의미이다. 물론 이는 내 무지에서 온 오해일 것이다. 그 많은 학자들이 논리를 펼치며 쌓아온 것은 분명한 학문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라는 종교 또한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으로 다뤄지는 영역이 별도로 있으니 말이다. 

  [교육학의 재건], 이 책은 서양학문의 위치에서 다뤄졌다고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면서도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왜일까? 해당 구분을 처음 접한 것도 영향이 있겠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의 위치에 대해 큰 범주에서부터 좁혀나가는 작업에 있어서 세련되고 학자다운 자세라는 것을 느껴서 그런 모양이다. 할 수 있다면 나도 이런 자세를 갖출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락에 대해 중시하는 관점을 갖고 있는 나라고 하지만, 그 맥락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없어왔던 터라 이런 작업의 필요성을 체감하게 된 경험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학자는 진리에 대한 영원한 구애자이다. 사실이 사실대로 판명될 수 있는 방식으로 처신하고, 또 아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공개하고, 모르는 사실은 주저함이 없이 알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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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려운 곡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학문은 대상세계에 관해서 묻고, 규정하고, 증명함으로써 상식, 이데올로기, 교조의 한계를 넘어서서 우리의 인식이 타당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발전하는 세계로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_p27

  학문이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상세계를, 진리를 보기 위해 역경에 굴하지 않고 끊임 없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묻고, 규정하고, 증명하는 것이 그 방식이다. 이 방식 자체는 사회의 발전이 가능하게 했던 정말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이는 학문 자체의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개인에게도 적용 되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특히 인지왜곡 같은 경우가 그렇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오류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대신 자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기준 같은 대전제 하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는 게 중요할 뿐이다. 인지왜곡이 이를 방해하는 요소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방식이 도움이 된다. 이걸 남이 대신하는 것보다 스스로 직접 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세계가 지닌 특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할 것은 그 인식대상과의 차별이다. 자연과 자연과학은 다른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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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세상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킨다. 그로 인해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제이다. 학자는 길을 알지만 운전은 못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지식과 학문의 대상세계에 대한 적응능력이 우연히 한 몸에 공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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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도가 교육관을 개선해야 할 고유한 임무를 저버리고 곧바로 교육의 문제해결에 나선다면 이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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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접 드러내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인식체제의 창안은 가능하다. 학자의 과제는 가능한 한 그것들끼리 서로 접근시키는 데 있다.
_p28,29

  '자연과 자연과학은 다른 세계다.' 흔히 수학이나 물리 같은 것을 대할 때 진리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걸 볼 때면 신기했다. 내 입장에서는 단순히 자연을 표현하는 비교적 정교한 언어체계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던 것을 잘 표현해준 문장들이 보여서 반가웠다. 다음으로 흥미롭게 보인 새로운 지점은 관점을 넓히는 일과 실제 대상세계를 다루는 일의 구분이다. 마치 명확한 분업을 요구하는 듯이 보이는데, 선택과 집중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이론만 다루고 대상세계를 다루지 않는 학자에게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던 내게는 색다른 문장이었다. 철저히 분업을 추구하기보다 그 둘의 영역이 적절히 연결되어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지적한 것은 그 두 일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아닌 것은 맞다. 그런데 '교육학도의 임무'를 설명하는 것을 보니 오류라고 정의하는 문장에서 왜 오류이지?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전자의 일(교육관 개선)이 교육학도의 일이라고 할 때, 후자(교육의 문제해결)는 누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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