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교육학의 재건

상식과 학문의 공존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가

가랑비 2026. 3. 25. 12:06

1.4.2 통상적 담론과 비통상적 담론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는 사회적 통념과 제도에 근거하고 아울러 반영한다. 상식은 누구나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 용어는 일반 사람 사이에 서로 소통하기에 편하지만 그 인식내용의 수준에 있어서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없다. 이처럼 일상적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그 상식과 제도 안에 감금시킨다. 설사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는 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존재"로 취급되어 분리되고 추방당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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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적 언어의 이점과 그 폐해에 대해 동의한다. 다만, 추가적으로 살펴야 하는 지점으로 보이는 것은, 그 상식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평등하게 주어지는 게 맞느냐이다. 사회변화를 일찍 받아들이는 사람과 자신에게 이미 익숙해진 것에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회변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그 상황이 다각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분명 누군가에게 상식이 저이에게는 상식이 아니고, 역으로도 옳게 여겨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시기적으로는 물론이고 공간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상식이 저기에서는 상식이 아니다. 만약 공통되게 나타나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온라인상에서 커뮤니티에서 다뤄지는 주제와 관련한 것이 있을 것이고, 그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등하게 주어진 상식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의 인식을 벗어나는 사람들도 있다. 자아실현이라는 개념도 이에 동조한다. 세상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더 높은 수준의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그 방법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은 마지막의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의 창조와 배움을 통해서 일상적 언어의 감옥과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지성인에게는 그런 수준의 담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발전하는 사회라면 그 담론을 평가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공중이 탄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처럼 좀 더 격조 높고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는 담론을 비통상적 담론이라고 한다. 이른바 고담준론이나 생산적인 논의의 진전은 언어의 세련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상식에 구속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일반인이 거기에 참여하려면 보다 나은 경험을 토대로 그 언어를 습득해야만 한다.

  이런 일상적 언어에 대한 내용과 학문적 언어와 같은 새로운 언어의 구분에 대해 이견이 없다. 게다가 이런 새로운 언어 습득의 필요성에 대해 앞서 언급된 문장처럼 상식을 틀렸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비정상적 존재'로 치부해 버리는 것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보면 납득할 수 있다. 실제로 틀린 상식에 대해 틀렸다고 말하는 이가 비상식적인 존재인 것은 맞지만,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고민이 남는 지점이 있다. 이러한 것에 보호 차원에서의 구분이 아닌, 권력의 형성에 대한 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일상적 언어가 가지는 폐해가 분명 심각한 수준인 것은 맞다. 이에 대해 조치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일상적 언어로 인해 유지되는 삶 자체를 부정해야만 하는가? 결국 여기서도 나는 상식과 학문의 공존을 외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직 답을 알 수는 없지만, 그 공존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게 내 최대 관심사이다. 그렇다. 이미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었다. 그냥 내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었다. 과거의 경험처럼 발작버튼 눌리는 감정적 반응은 없어졌지만, 의문버튼이 눌리는 것은 여전하다. 무의식적으로 눌리는 버튼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존재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나의 인생을 바쳐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해온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어떻게'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껏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다 문득 접한 질문의 경중으로 '무엇'에 대한 고민이 더 중요하다는 표현을 보고 나에 대해 점검해 보았다. 신기하게도 무엇을에 대한 질문이 없이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천착하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나의 경우 무엇에 대한 질문이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엇은, 나의 생존과 타자의 생존이 공존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사회에 해결될 수 없는 형태로 만연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지점에서 나의 인생의 목적이 이미 주어져있던 것이나 다름없음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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