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중구난방의 교육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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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분명한 착각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어떤 다양한 교육관들이 있음을 살폈다. 교육에 관한 어떤 논의에도 모종의 교육관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에 대한 발언이 아니고 교육에 관한 각자의 관점과 견해를 발언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 발언의 대상이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다. 거기에는 학부모의 학교에 대한 불만, 용병학자들의 체계적인 곡해, 결과위주의 허장성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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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지적이다. 나는 항상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소통이 안 되는 원인을 이것으로 꼽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유별난 게 맞구나 싶긴 하다. 어원을 찾고, 유래를 알아보고 하는 게 습관처럼 있었던 게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에 대한 태도가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겠다. 여기서도 교육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언급하지만, 그 교육이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빠져있으며, 심지어는 마치 모두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착각이라 지적하는데, 동의한다.
어떻게 다르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서술이 된다는 점이 정말 딱 떨어져서 좋다. 교육관이 모두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그에 따라 말하고자 하는 교육이 다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 교육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르고, 무언가를 말하는 데 있어서 관점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소통이 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은, 코끼리를 더듬거리는 것을 통해 전부를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더듬거리다 보면 그것을 통해 교육이 어떠한 것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좀 더 확장된 관점을 찾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이게 만약 가능하다면, 이 상황에서 근원적 문제는, 본인들의 관점이 옳다고만 집착하고 상대를 배척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더 공존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교육관이 틀린 것이라면 교육에 대한 천 마디 말도 소용이 없다. 그릇된 교육관을 토대로 올바른 교육을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소통할 정도의 의미의 공유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교육"에 대한 선입견과 가치 기준에 대한 철저한 사전 검열을 거쳐야 한다. 그 검열도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추궁하는 데 불과하다. 우리는 이전의 논의에서 그 어떤 해답도 교육의 정체성과 먼 거리에 있다는 점을 이미 검토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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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서 등장하는 문장을 통해 저자는 올바른 교육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나의 고민은 올바른 교육이 과연 존재하는가?로 이동한 상태이다. 반면교사라는 용어가 가장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안 좋은 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얘기인데, 그 덕에 그 길은 피해 간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더해서, 칸트는 강의하는 대상을 중간 정도의 수준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때 했던 표현으로 '바보는 도와줄 길이 없고 천재는 자기 힘으로 해나간다'라고 했다더라. 온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강의에 대해 대상을 정하는 명분으로는 충분하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제각각 위치해 있고,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에 따라가게 되는 길이 달라지는 것일 뿐은 아닐까? 그렇다면 교육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을 때 만족스러울지 찾는 데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시점에서 내가 올바른 교육이 있다는 전제 하에,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면 이런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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