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꺼내/글싸기

수단과 목적

가랑비 2026. 5. 31. 12:50

  수단은 필연적으로 목적 달성 후에는 버려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가 언급했던 것처럼 사람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게 널리 알려진 게 아닐까 싶다. 사람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수단으로 취급하면 그 본질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들이 많다. 그것들은 곧 인간성을 대표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최근 즐거움과 보람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이 가고 있다. 이 두 키워드가 그러하다. 

  우리 사회는 복합적이다. 그 한편으로 사회는 부작용 덩어리이다. 학교라는 시스템도 탄생 이전과 비교할 때 상당히 고차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는 그 목적에서 많이 빗겨나간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최초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고민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이 사회가 굴러가고 있으리라. 또한 아무리 방향이 빗겨나갔다고 한들, 학교의 존재가 있음으로써 확보하고 있는 최소한의 이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도 사실이다. 학교가 정말로 없어진다고 가정하면 그 사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낭떠러지로 굴러갈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학교에서 등 모든 환경이 목표지향적 성격이 유리하도록 작동하고 있다. 이것 자체는 굉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맞으나, 우리가 고질적으로 겪는 문제를 보면 사람은 그것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해하면서까지 돈을 추구하면 교정당하게 되는 것처럼 목표지향도 사람과 함께 할 때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고 본다. 

  [교육학의 재건]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인간 개개인에게는 교육현상을 뗄 수 없다. 그럼에도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학교 학원 등에게 교육을 위탁하며, 피교육자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은 교육 주체성을 빼앗긴 삶을 학습한다. 그 결과로 교육에 있어서 학교를 탓하게 되는 책임회피의 태도를 배우게 된다. 소수의 인물들이 이런 부작용에 갇히지 않고 나아가게 되는 상황일 뿐이다. 학부모의 그늘 아래, 현대 사회에서 고통을 제거해 주려던 시도는 주체성을 잃게 만드는 부작용을 심어주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비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고질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인생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 그리고 현대 사회가 시간이 갈수록 복잡성은 심화되고, 그 속도는 점차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각자 자신의 관점을 확장하면서도 꾸준히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 일원으로서 한 마디 꺼내보려는 작은 시도를 해 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는 대다수의 것들이 주객이 전도가 되었다고 느꼈다. 거기에서 나는 굉장한 고통을 느꼈으며, 부적응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왔던 삶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진짜로 실패에 그쳤다. 적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적응이라는 것 자체도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적응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재미있는 지점은 실체는 없으나 존재한다. 마치 무슨 신적 존재인 것처럼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 사회에는 온라인이라는 환경이 만들어 낸 어떠한 가상의 존재가 탄생했다. 물론 이 존재는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온라인을 통해 훨씬 더 가시적인 느낌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 존재가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장면들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내가 느꼈던 고통은 어쩌면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이라는 게 다양한 상황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 그것을 잠시 마취시킬 수 있는 것들이 이 사회에 sns, 영상매체 등 수많은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그런 마취에 그치는 것으로는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가치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내게 진짜 '만족감'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을 찾아 헤맸다. 

  그러한 만족감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찾기 위해 집착했고, 마침내 찾았다. 그리고 누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 돌아보는 나의 과거와 사회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객전도가 되었던 게 맞았다. 하지만 이게 더 이상 비난으로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못하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그들에게 작동하는 '현실'은 내게 절대 현실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눈을 진짜 조금이나마 뜨게 된 시점에서 나의 현실은 절대 가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수단으로 전락하여 목표 달성 시 바로 버려지는, 토사구팽의 대상이 된 것들에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인간성'이 너무나도 많다. 이러한 것들을 가르칠 수 없는 환경이 된 것은, 이미 어른이 된 이들에게조차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원인으로 꼽자면, 전쟁이 크다고 말하고 싶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그리고 지금까지의 지구의 모습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는 듯하다. 한국만 그런가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보이는 것에 있어서 눈을 좀 더 멀리 들어 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반성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보고 배운 바가 그랬기 때문이리라 변명했다. 그러나 더 이상 책임회피에 머물고 있고 싶지 않다. 내 속은 짐승적 본능과 사회악의 것과 가치 지향 등이 뒤섞여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이제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딛고 나아가는 삶을 지향한다. 내가 만약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나는 악인이라고 스스로 낙인을 찍고, 악행을 더 저지르며 사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주홍글자]처럼 낙인조차 그 의미를 바꿔버릴 삶을 사는 것에 멋을 느낀다. 

  결핍.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지금까지 횡설수설했다.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사용했던 행동들에 대해 반성한다. 달리 해석할 겨를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자기위로를 한다면 내가 원하고 원했던 것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원한 것은 연결이었기에, 그 진심이 전달이 된 이들에게는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덜했으리라 믿고 싶다. 결핍이 무엇이었든 간에, 결핍을 채우는 것만을 원한 것이 아니라, 진짜 연결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면죄부를 달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부족한 면이 많지만, 이제 조금이나마 이 연결의 세계에 눈을 뜨고 있다. 앞으로의 삶이 기대되는 것은, 그 세계 속에서 배우고 살면서 누릴 그 감동적인 살아 숨 쉬는 경험들에서 나타날 감각들, 만족감과 에너지 등이 있다. 더 이상 사람과 인간성을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릴 것에 대해 가까이하지 않고자 한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최소한 한 가지라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예를 들면, 자살하지 않을 확신과 같다. 나는 과연 자살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을 때, 내가 추구하는 방향을 향해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며 걸어가다 보니 그 길에 놓여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어나갔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세상에 많은 면들에 대해 '실수'를 실수로 그치게 만드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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