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꺼내/글싸기

상대시간 학교, 초월학교

가랑비 2026. 4. 16. 11:33

  미국이나 유럽의 어딘가에서는 실제 시도해 본 사례가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다큐에서 본 기억이 나는 장면 중에 학생의 수준에 따라 나아가도록 하는 시스템을 보여주는 게 있었다. 우리네 학교는 시간 순으로 가는 절차를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실패자들이 양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학이나 영어 같은 경우 수준별 학급을 진행했었고, 나의 학생 시절에도 작게나마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럽게 격차를 인식하는 도구로만 활용될 뿐이었다. 의도는 좋으나 잘하는 애들 못하는 애들로 급을 나누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꼴에 불과했다.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시간대를 왜 학교에서 정하는가? 이는 역시 철저하게 보편 학교 교육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효율을 중시하기 때문에 깔린 전제에 불과하다. 물론 보편 학교가 없던 시절에 비해 보편 학교의 등장은 필요성이 매우 높았으며 그 역할은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상당했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 심화되는 복잡성에 따라 보편학교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격차는 학교에서 정한 시간으로 담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순서를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학교가 정하는 시간대에서 탈피하여 개인의 시간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년의 학교 과정이 있었다면, 학교 차원에서는 3년의 기간을 설정하되, 개별적으로 절대평가를 통해 일정 수준을 통과하면 그 학교를 졸업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이 또한 결과적으로 1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고 5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언급한 수준별 학급의 문제점과 유사한 상황이 보일 수 있겠다. 대신 그 수준은 기준치를 통과한 것이기 때문에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의 구분이 아니라 속도가 다른 것이라는 관점으로 바꾸는 결과를 만들어 줄 수 있다.

  이 역시 사회는 여전히 효율을 중시하기 때문에 속도가 빠른 사람을 선호하겠지만, 빠르게 배우는 사람과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가진 장단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구분은 다분히 선악에 준하는 구분이 되는데,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빠르게 배우는 사람은 모두 재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잘 걸러내어 에너지를 한 곳에 쏟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재능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목표가 칼같이 잘라지지 않고 넓은 시야로 접근하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이는 나무를 보는 사람과 숲을 보는 사람의 구분이며, 이 둘은 사회에 거의 비중이 절반씩 모두 필요하다. 

  물론 이미 조기졸업과 유급이라는 제도를 통해 비슷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 왔지만, 전제를 바꾸는 것은 엄연히 다른 작업이다. 기존에는 옳고 그름으로 정착되어 있는 학교가 정한 시간대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개인의 시간대가 다름을 학교 차원에서 공인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개인의 시간대가 다르다는 것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도입할 것을 상상하게 된다. 필요할 수 있겠지만, 그 용도는 지극히 작은 범위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 나무를 보는 사람이 가진 특징, 숲을 보는 사람이 가진 특징을 일직선 상에 놓고 볼 때, 어느 편에 있는지를 판단하고 그 둘을 딱 잘라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학교 입장에서 가능한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시도해 볼 수 있겠다. 예상하건대, 절대로 고르게 받는 것에 성공할 수 없을 것이며,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 둘은 고르게 분포될 것이기 때문에 그 구분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 

  이런 상대적인 시간을 공인하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교과목에 대한 설정과 전달법에 대한 고민이 새로 요구된다. 기술의 발전을 적극 활용하여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시스템을 확보할 수 있다. [교육학의 재건]에서 말하는 교육의 내재율에서 꼭 짚어야 할 것으로 보은 것이 바로 '교육은 선택사항'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대학의 그것과 유사하게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졸업요건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한다. 또한 어떤 교과목을 선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런 고민들에 갇히다 보면 어느새 기존의 학교와 동일해져 있고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 굴레에 빠진다.

  아예 이 틀에서 벗어나 '초월학교'에 대한 제안이 등장할 수 있겠다. [교육학의 재건]에서 등장하는 교육학만을 다루는 학교가 등장한다면 어떨까. 또한 여기서 등장하는 용어인 품위를 하나의 피라미드로 비유해 볼 수 있겠다. 그 품위라 함은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 인구수만큼 될 수 있다. 교육학을 중심으로 그의 소재가 되는 품위는 본인이 스스로 설정하여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른 기관과 연계하여 그 품위의 수준에 대해 상구와 하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선배를 찾아 나서게끔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설정된 교과목은 교육학과 개별 품위 이렇게 두 가지이다. 졸업 요건은 그에 대한 일정 수준을 확보했음을 다방면의 평가 방식을 통해 입증하도록 할 수 있겠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는 사회에 나아가 어떤 곳에서든 수월하게 적응할 것이며 기여하는 바가 충분하고도 넘쳐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필요한 것은 개별 교과가 아니다. 그것을 아우르는 무언가에 대한 의사소통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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