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 노래 좋다. 버추얼 아이돌이 생소해서 반감을 느끼지만, 이것도 보다 보면 적응하게 될 듯해서 짜증(?) 난다. 그래도 적응에 긍정하게 되는 개연성은 노래가 좋기 때문이다. 노래와 연관은 딱히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이 아주 폭력(positive)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인생에 걸쳐 가져왔던 의문은 반감에서 비롯되었던 날이 많았다. 물론 그전에는 아이의 때 묻지 않은 호기심이었던 적도 있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아쉽다. 내가 기억으로 붙잡고 있던 의문들은 모두 폭력이라 여긴 것에 대한 반항의 질문이었다. 왜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하기 싫으니, 해야만 하는 이유를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말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따를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질문에 대해 보다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해왔던 것 같다. 질문과 함께 걷는 시간이 늘었고, 굉장히 재밌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 [싯다르타]를 읽은 뒤 그동안 내 인생에 있어서 목적지에 가까웠던 꿈인 마을 만들기에 대한 의문을 품게 했다. 어떤 회의감 같은 무너지는 감각이 아닌 게 신기하다. 대신 정말로 호기심에서 다가오는 질문이 생겼다. 만약 한 인생이 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그만의 나름의 길이 있다면, 그것을 막는 것이 무의미하다면?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고 있는 마을이 제공할 가치가 사회에 있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단 확실한 것은 사실 그 마을에 대한 꿈의 시작은 '자녀가 생긴다면'에 있었다. 그리고 실은 자녀가 원하게 될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이 간극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고, 그 마을은 사실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꼭 마을의 형태일 필요가 없어진다는 결론이 튀어나온다. 아쉽게도 어떤 길을 제시해 주지는 않고 기존의 것을 흐리게 만드는 상황이 된 것 같다. 예전에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대책 없는 것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또 느낌이 다르다.
질문이 내게 머무르고 있는 동안 또 나의 삶은 그 질문과 함께 이어지고, 그 삶이 가지는 그 삶만의 재미가 있기 때문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 질문에 대한 모험을 하는 과정이 즐겁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다. 다만 내 인생의 에너지를 초점을 맞춰주던 것을 흐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이전처럼 무작정 흘러가게 두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쫓기는 듯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충만한 감각 속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나는 내가 지금 원하는 것에 더욱 가까이 가보려는 행동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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