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꺼내/글싸기

매복 신념

가랑비 2024. 12. 29. 15:23

  사람에게는 몸과 '나'라는 개념이 있다. 몸은 저장장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수행 도구이기도 하다. 몸의 저장 방식은 최소 두 가지가 있다. 시각, 청각 등의 감각으로 입력되는 것과 수행 도구로써의 몸이 직접 운동하는 것의 반복 작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보고 따라 하거나, 사건에 대응하는 방식등을 반복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몸에 특정한 방식들이 형성되고 강화된다. 몸은 그렇게 그 사람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몸이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특이점이 발생한다.

  이 특이점은 흔히 중2병이라는 시기를 거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정확히는 흔히 사용되는 의미의 중2병은 아니다. 코기토가 뜻하는, 존재하는 '나'에 가깝다. '나'의 개념이 몸에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가 있다. 이 시기가 누구에게는 3살에 오기도 하고 생체 나이로 성인이 된 이후에 오기도 하는데, 흔히 중2쯤 벌어지는 현상일 수 있다. 이후 몸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는 변화를 겪게 된다. '나'가 욕망하는 게 생기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욕구의 수준에 그쳤다면 충족되지 못하는 무언가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나를 의식하기 이전의 사건들로 구축된 몸의 세계와 충돌하게 된다. 의식하지 못하는 몸의 기억으로 인해 '나'가 원하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반복 수행한다. 몸이 만들어내는 자동화된 수행으로 인해 '나'는 스스로를 이런 사람으로 정의하게 된다. 몸이 세계를 구축하던 도중에 탄생한 '나'는 마치 기억상실증으로 코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몸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참고하여 스스로를 정의하기도 한다.

  이 정의와 '나'의 견해가 일치하면 문제없이 살 수 있지만 이런 경우가 드물다. 몸과 '나'의 충돌이 벌어지게 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몸의 자동화된 수행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 같은 '나'로서는 이겨내기 어려운 상대이다. '나'가 우선순위를 세워도 그 즉시 파괴되는 꼴을 보는 것, 또는 '나'가 신념을 가진다고 생각해도 흔들리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몸이 '나'에게 강력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이 주장은 마치 지뢰 찾기 게임처럼 작동한다. 밟기 전엔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훨씬 고난도다. 한 번 밟은 지뢰는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내가 누르는 한 칸은 실제 지뢰가 위치한 쪼그마한 한 지점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밟았다고 다른 지뢰들의 위치를 알려주지도 않는다. 관련이 깊은 개념이 발작버튼이다. 발작버튼이 눌리면 쉽게 감정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 이 폭풍에 휘말리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 주변 사람들도 쉽게 빨려들기도 한다. 이 발작버튼을 탄생시키는 것이 다름 아닌 매복 신념이다.

  신념이라 하면 보통 '의식'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는 하는데, 매복 신념은 의식하지 못하고 몸에 저장되어 있는 신념을 의미한다. '나'가 탄생하기 전에 구축된 몸의 세계는 습관 덩어리이면서 신념 덩어리이다. 이때의 몸은 특정한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결과 값을 알 수 없는 블랙박스인 셈이다. 

  매복 신념은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 않는다. 매복 신념은 '나'가 탄생하기 이전 몸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나'의 견해와 일치하면 그 사람은 내면의 갈등이 없다. 그러나 '나' 외부의 '나'와의 갈등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할 뿐이다. 앞서 언급한 발작버튼은 매복 신념의 땅에서 자란 열매와 같기 때문에 이 또한 좋고 나쁨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다만 분노에 휩싸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발작버튼은 적을수록 몸에 이롭다. 마치 스팀팩 같은 것이다. 피를 깎고 수행의 활성화를 돕는 셈이다. 분노가 아주 적절한 곳에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사회에 해악이 되는 곳에 분노를 표하면 사회에 이로운 방향으로 많은 수행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매복 신념을 밝혀내면 발작버튼을 수정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매복 신념을 밝혀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과학 실험하듯 실험 환경을 계획해서 수행해야 할 만큼 어렵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문화가 정체성이 뚜렷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면 가설의 가짓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일례로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면 나이에 있어서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는 것처럼 큼직한 것들이 있다. 초면인데 10살 어린 사람에게 반말로 어떤 문장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기존 문화와 다른 문화를 상상해 왔거나 경험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방식으로 큰 가설부터 회로 도통 검사를 하듯 하나씩 찍어보면 몸이 반응하는 문장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 반응이 내가 의식하고 있지 않았거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유의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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