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녀석이 눈에 띄었다. 사실 얼마 전부터 계속 내 눈에 들어왔다. 내 눈 밖에 나도록(?) 시도를 몇 차례 했었다. 특히 물을 뿌려서 떠내려가게 시도를 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이 녀석 날개에 특수한 처리가 아주 강력하게 되어있나 보다. 물세례를 아무리 맞아도 젖지 않는지 가볍게 벗어나서 부근에 다시 멈춰있다. 한두 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휘두른 내 손에 죽었다. 그러니 같은 녀석은 아닐 테다.
이번 만남은 묘하게 나를 괴롭힌다. 물론, 이 녀석은 죽었고, 죄가 없다. 이 녀석이 죽게 된 방식과 똑같아 보이는 나의 삶이 뇌리를 스쳤고, 이 묘한 매칭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전말은 단순하다. 내 눈앞에 있었고, 큰 의식 없이 휴지뭉치를 들고 이 녀석보다 빠른 속도로 벽에 손을 향했다. 'MISS' 그러나 이 녀석은 날 당황스럽게 할 만큼 바로 옆, 불과 몇 센티도 안 될 만큼의 거리에 다시 앉아 붙어 있다.
나를 괴롭게 한 그 인식이 나를 실제로 괴롭다는 느낌을 주기도 전에 내 손은 이 녀석을 향했고, 이 녀석은 죽음을 맞이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먼저 든 것은 의문이었다. '대체 왜 바로 직전의 일로 죽음을 면했을 텐데 대체 왜 죽을 뻔한 곳에서 멀리 달아나지 않았을까?' 이 호기심이 머리를 들고 나서야, 그제서야 기시감이 들었다. 나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네. 나도? 어떤 점에서 똑같을까? 젓가락 두 짝 같이 똑같진 않겠지만.
죽음의 위협을 어떻게 대하는가.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은 척을 해야 하나, 도망가야 하나, 나무에 올라야 하나. 죽으면 그 생명(?)은 끝난다. 이는 비가역적인 것으로, 게임에서 Retry 하듯이 되돌릴 수가 없다. 학습이라는 것을 통해 기존의 삶에서 죽음의 위협을 미리 예방하고자 한다. 학습이 불가능했거나, 불가능한 구조라고 하더라도, 유전의 접근으로는 멸종이 아니라면 생존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엣지 오브 투모로우, 2014]에서 나온 흐름처럼, 한 개체가 기억을 가진채 다시 살아나서 생존의 경우의 수를 밝혀내는 것은 아니더라도, 뻗어나가는 방향에서 해당 시기에, 한 가지의 죽음은 최소한 반복되어 나타날 경우를 줄인다. 그렇게 죽지 않은 케이스가 살아서 반복되고 뻗어나간다. 죽음과 반복과 뻗어나감은 한 묶음으로서 유전자는 생존하고 있다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나 자체만 본다면, 나는 죽게 되면 끝이다. 최소한 이 생은 끝이 나는 것은 명확하다. 내가 마주한 세상 속에서 나는 끝나는 것은 분명하다.
개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생존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그렇기 때문에, 목격하는 죽음의 위협은 회피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생존하는 것에 한계는 명확했고, 그렇게 뭉치고 뭉치며 현재까지 확장되어 온 것이겠다. 이 사회가 너무나도 확장되어서 적응하기에 급급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여유가 곧 사치가 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물리적 죽음이 사라지고 나니,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 된 것이 아닐까? 또한, 태어날 때부터 이랬던 사람에게는 이게 당연한 세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으로나 적응 면에서나, 회피는 생존에 도움이 되기는 하다는 점이다. 가장 손쉬운(?) 행동교정 방법은 처벌적 접근이다. 특정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그 행동을 반복하지 못하도록 혼을 낸다거나 하는 등의 방식이다. 겉으로 볼 때 말 잘 듣는 아이가 다 좋은 것은 아닌 이유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해도 되고 안 되는 행동을 가르는 기준에 대한 학습은 이 방식만으로는 모두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죽였던 '이 녀석', 나방파리와 같이 단순히 옆으로 자리를 옮기기만 할 뿐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라도 죽음을 연기하는 것은 분명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살아서 학습의 기회를 가질 가능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었던 것인가. 다행히도 학습의 기회를 얻고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나마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좀 달리고 있는 줄 알았지만, 여전히 걷고 있다. 이전엔 대체 뭐였나, 기어가는 거였나 보다.
한편, 더 생각해 보면, 나는 나방파리처럼 처벌이 내려질 때, 옆으로 피하지조차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짜증 낼 뿐이었다. 그런데도 안 죽었다. 내가 죽음의 위협이라고 느낀 것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나'의 죽음이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 위기에 처했다고 여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 외엔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얼마나 태평성대인가. 그런 방식 따위로는 나를 물리적으로 죽이지는 못하는 사회. 그래서 이런 나도 살 수 있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 했던가. 지금 사회가 말하는 '살아남는다'는 말의 의미는 전장 속에서로 국한 지어 말하고 있다. 그 말을 하는 이들은 모두 참전 중이다.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하나의 축구 경기를 보는 것 같다. 그들은 수많은 리그에서 경기를 펼친다. 축구를 하나의 피라미드로 보면, 정상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쟁터는 셀 수 없이 많고, 점차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의 의미는 또 천차만별일 것이다. 정상에 서고, 그 정상을 유지한다는 말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범위를 넓게 하면 유명 리그에서 프로 자격을 유지하는 것부터 등등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말이 사용되는 범위가 정상을 향한 치열함이 보이는 곳일 것이다. 이들의 노력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다만, 비유는 비유여서, 비유에서 그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점차 살기 좋아지는 우상향 흐름을 겪어왔다.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점차 높아진 것이다. 이걸 인정하기 어려운 작태도 여전히 곳곳에 보이기도 하고, 개개인의 입장들을 살펴볼 때 천차만별이어서 맞는 말이라고 퉁치기만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런 사회 덕에 목숨 연장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싶은 것일까? 물론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나방파리의 방식은 내게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진화론적 접근에서 볼 때, 진화가 덜 된 것일까? 죽음의 위협을 불과 1초도 안 되는 시간 전에 목격했음에도 죽음의 위협에서 거리를 크게 두지 않는 모습에 의문이 든 것이다. 찾아보니, 죽음의 위협이라는 인식 없이 자극에 대한 리액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의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에너지를 아끼고자 하는 노력 사이에 내려진 최적화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의 호기심에 마침표를 찍어 일단락시켰다.
그의 방식은 결국 내 손에 죽음으로써 더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타의에 의해 더 이어갈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내 그동안의 노력은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일까? 절대 한 가지만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게 지금의 결론이다. 발전된 사회와 가족의 울타리 덕에 부지한 삶도 맞고, 그 안에서 생긴 나름의 고통 덕에 발생한 '나'로 지금 존재하고 있다. 내 삶의 방식이 어떻게 주어졌고, 형성된 것인지는 전부는 몰라도, 한 번 끝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