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꺼내/글싸기

말 못 할 고통

가랑비 2026. 7. 22. 10:22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너무 어려웠던 순간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잘잘못을 따질 필요는 없는 상황이기도 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굳이 굳이 따져보자면 내가 잘못했던 경우가 많기도 하다. 보통 이럴 때 판단과 비판, 심지어는 비난의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 상처를 받고 더욱더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지는 상황에 놓이는 흐름이었다. 오랜 기간 나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말로 내 상황을 나열한 것이다. 

  이런 답을 들은 상대방들은 제각각의 다양한 표현들과 함께 우리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누구는, 비유를 들며 내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다. 칼로 찔러놓고,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면 찔린 사람이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느냐. 누구는, 쉽게 끝낼 수 있는 걸 어렵게 만드냐며 지적한다. 그냥 '미안해' 한 마디면 끝날 텐데 왜 그 쉬운 걸 못하느냐. 누구는, 속담을 말하면서 잘못은 나에게 있다고 비판한다. 적반하장이다. 네가 잘못했으면서 왜 남 탓을 하느냐.

  안타깝게도 나는 이게 왜 자꾸 이렇게 흐름이 이렇게 되는지 모른 채 관계에 금이 갔다.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양해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 닥칠 때마다 결국 상대방의 넓은 아량 덕에 유지가 되거나 끊어진 것 같다. 끊어질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경우는 특수한 경우여서 많진 않긴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내가 정말 아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바랐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서운함을 표할 때, 나는 그 말에 상처를 받았다. 이 흐름이 과해지면, 나는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 '내가 그동안 한 노력은 어디로 간 거지?' 등의 생각이 쌓이면서 억울함이 올라왔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결국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한 채로, 상대방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당시에 이 말을 듣고 생각한 것은 '나는 왜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할까?'였다. 고민 끝에 나온 답은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힘든가 봐."였다. 

  상대방이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느낌을 겪었을지는 모르겠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넓은 아량으로, 사실은 그냥 이해가 되지 않아도 참고 넘기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되면, 나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게 된다.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걸 내가 받아들일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봐도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인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인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는 상대방은 없고,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꼴이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생각이 이런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놀랍다. 다행히도 이런 생각을 발견한 덕에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런 부작용 덩어리이고, 사회는 그런 부작용 덩어리의 집합이다. 얼마나 더 놀랄 일이 남아 있을지 기대되는 시점이다.

 

  한편, 위 생각에 대해서 다시 살펴볼 기회가 생겼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있었고, 그 정체는 익숙했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로 인해 불편을 겪은 상황에 대한 생각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꿈이라고 말하던 두 문장의 중의 하나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면서'였다. 그래도 지속적인 개선 덕에 많이 사람이 되어서, 이제는 예전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왜 이게 이렇게까지 고통이 클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런 존재이고 싶을까? 추상적이지만 다른 표현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존재감이 있으면 좋겠다. 특히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든 다 좋다고 하진 않는다. 동시에,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행위'로써 내가 필요한 존재이길 바란다. 욕심도 참 많다. 그렇지만 이 덕에 지금의 내 서사가 구성되고 있다. 

  이제는 이 고통을 놓아주고자 한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터득해 나가고 있고, 더욱 내가 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상대에게, 나에게 이로운 것을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봤던 전시에서, 아주 인상 깊었던 화가가 있었다. 카라바조.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이 갔던 작품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골리앗의 수급을 들고 있는 다윗(1610)]이다. 해설을 보고 더욱 인상 깊었는데, 다윗의 얼굴도, 골리앗의 얼굴도 화가 본인의 얼굴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생의 말로 갈수록 파멸의 길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자세한 내용이나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요소 몇 가지가 내게 준 감상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었다. 이 그림에 나의 심정을 대입해서 보게 된 것이다. 어릴 적 때 묻지 않았던 나. 그리고 나조차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른 채 방황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만 입히고 있는 나. 이런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도 고통스럽다. 어릴 적 내가 다시 돌아와 지금의 나를 멈춰주길 바라는. 죽여서라도 멈춰 주길 바라는. 이런 해석으로 지금 다시 다가온다.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내가 너무나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 고통이 크다는 것을 알아주는 듯하다. 이런 해석으로 이 그림 다시 다가왔다. 물론 어릴 적 내가 돌아온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는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으로 한 발짝 다가선 '나'이다. 그런 내가 내게 옴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 고통에 머무르는 나를 죽여서라도 말이다. 이젠 그 고통이 아픔이 아닌 불쾌함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이게 이제 아픈 게 아니라 불쾌한 것은 이제는 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숨기고 싶기 때문이다. 못난 모습이라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더욱 밝히고, 발가벗겨서, 전시하고 싶다. 이 그림처럼. 나의 과거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이고, 모든 나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접근이 앞으로의 나의 삶에 있어서도 내가 지향하는 그림이다. 내가 지향하는 멋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나의 이 말 못 할 고통은 이 그림 안에 남아서, 볼 때마다 되새기며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이 그림 덕분에 나는 다시 한 꺼풀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다. 나의 고통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이다. 벗어나서, 나와의 관계 속에서 고통받았던 이의 마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 그 고통을 헤아리고, 어루만질 수 있도록 손을 내밀고 싶다. 이제는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 책임감에서 죄책감에서 미안한 게 아닌, 진심으로 그 고통에 다가가서 얼마나 아팠을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해서 나오는 말로써 말이다. 

 

  이 고통을 겪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길 희망한다. 물론, 앞으로도 관계 속에서 내 행동이 불편을 초래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겪는 고통으로 인해 상대의 고통을 보지 못한 채로 머물고 싶지 않다. 이런 나의 고통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매몰되어 집착함으로써 생긴 고통이다. 여기에서 벗어나 상대가 겪은 고통을 바라보는 것에 머물고 싶다. 제일 좋은 것은 애초에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겠지만, 아직 그 정도의 능력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아서 아직은 이렇게만이라도 나아가보고자 한다. 이제는 이미 준 고통은 어쩔 수 없지만, 그 고통을 헤아림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래야 내가 고통을 덜 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내 고통에 대해 살펴보고, 막바지에 도래했음을 발견하고, 뿌리를 뽑을 기회를 포착했다. 또한 한편으로 이 고통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던 차에 일찍이 발견했고, 정말로 보내주기로 작정함의 의미로 '애도'의 기회로 여기고 글을 꺼냈다. 천만 다행히도 의도한 바가 잘 따라준 듯하다. 이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정말 세계로 시선을 두고 시야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축하로도 이어지는 순간이다. 혼자 고통스러워하고 혼자 애도하고 혼자 축하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도 아니야~? 그래도 내가 바라던 그림이 이제는 조금이라도 그려지는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골리앗의 수급을 들고 있는 다윗(1610). 지금 다시 보니, 다윗의 표정이 달리 보인다. 찝찝하다는 표정인 줄로만 알았는데, 안타까움, 불쌍함 이렇게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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