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하기는 인간이 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한 타고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따라하기를 그만두게 된 것일까. 어린 시절 배웠던 이상적인 삶 그리고 직관적으로 발달시킨 유토피아와 인간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가까이서 손쉽게 반례를 볼 수 있다. 내가 배운 것이 적용이 안 될 때의 고통도 만만치 않다. 적용이 안 되는 것을 넘어서 오류라는 것을 알게 될 땐 어떻게 될까. 아마 인생이 뿌리채로 흔들려버리는 경험일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을 경험하게 되면서 불신을 갖게 된다.
따라 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행동으로 나온 결과는 행동을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데, 무작정 따라 했다가는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내용으로, 절을 다 없애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던 것 같다. 산속에 절이 있고, 그 주변에서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건 꽤 흔한 일이다. 목탁 소리가 들릴 때면 듣기 싫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축에 속한다. 당시에 누군가의 이야기만으로 그 존재를 싫어하게 되었던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중1 시절 깐죽거리는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와 어울려 놀았던 것 같다. 그런데 한 친구를 놀리고 했는데, 내가 하진 않았더라도 그걸 말리지 않았고, 보기만 했다. 당시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수년이 지나서야 내가 한 행동이 어떤 의미였을지 이해하게 되었고 충격을 먹었다.
물론 따라하기를 그만두게 하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들이 가능하다. 흔히 홍대병이라 불리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감각이 고도로 발달되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자신은 다르다며 선을 긋는다든지 하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이미 누가 닦아 놓은 길이라 하더라도 내가 직접 스스로 밟아나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있다. 누군가는 수학 문제를 풀 때, 답안지를 보지 않고 자신이 풀어낼 때까지 고민한다거나, 나의 경우에는 특히 철학 혹은 윤리적 아이디어들에 대해 고집했던 것 같다.
어린아이는 부모들의 입모양을 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모의 억양, 표정 등에서 나타나는 분위기를 읽는다고 한다. 언어 발달이 되기 전에 비언어적인 소통을 먼저 학습하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관찰력이다. 관찰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서도 학습의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관찰력이 떨어지면 따라 하기에도 문제가 생기고, 생존에 위협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나의 경우에 사람을 대할 때 두려움이 점차 커져가면서 쳐다보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었다. 관찰력을 발달시킬 환경이 못 된다. 내 가까이에 있는 존재를 따라 한다는 게 불가능한 셈이다.
긴 세월을 이렇게 살아왔다 보니 정말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누군가를 따라 한다는 행위는 더욱 그랬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게 있다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하기 이전에 구분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은 흡수하려고 하고, 단점은 잘 살펴서 따라 하지 않을 수 있게 구분하여 흡수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작업에 효율이 그다지 좋지 못해 왔었다. 이번에 한 가지 사고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면서 행동으로 옮겨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해 왔다. 익히 알고 이미 수차례 생각해 왔었지만, 거기에 만족(안주)하고 있었던 거구나 새삼 놀란다.
나는 내가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 사람들도 그걸 받으면 좋아하겠거니 하며 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보통 준다고 해서 받기란 쉽지 않다. 정작 나는 받고 싶은데 내가 주고 있고, 결국 받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면 한편 슬펐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도 했었다. 이걸 장착하게 된 계기는, 중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나는 내가 받기 싫은 것들이 있어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비효과라는 영화처럼 내가 없어져야 되는 정도로 나의 행동을 제약하게 되었다. 문득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 되겠다 싶어서 뒤집었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주자.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서 나중에서야 이 아이디어가 성경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대접하라.
-누가복음 6장 31절-
지금 생각해 보니, 교회에서 스며들었던 짬바가 있어서 학습했던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혼자 터득한 것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 같다. 말하자면 독학에 가까운 느낌이다. 이걸 깨닫고 행하는 과정에서 한계를 경험한 셈이다. 그러다가 이제야 그다음 단계를 발견한 것이다. 그게 사랑인 것이라 생각한다. 보다 더 상대방에 초점을 둔 행위. 상대방이 받고 싶어 하는 것을 주는 행위이다. 나는 지금껏 상대방에게 매료되었을 때마다 나타났던 모순이 있어왔다. 매료된 상대방을 갖고 싶어 할 뿐이었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매우 부족한, 소유욕이 강할 뿐이었다. 사랑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면서 그 방식과 용처에는 정말 무궁무진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된 것 같다.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때, 나에게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걸 이제껏 머리로는 알았더라도 훈련이 많이 필요했고, 활용할 줄도 몰랐다. 이제는 한 번 다방면에 활용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공부를 하는 게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90퍼센트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활쏘기 교육을 해보고 동아리 운영을 해보고 하면서 알고 있었다. 잘 따라와 주고, 잘 성장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것을. 그런데 받은 이가 내게 감사를 표해준다면 그것만 한 행복이 없다는 것도 체감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여태껏 나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의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있었구나. 이제 와서 보니 이 당연한 걸 왜 나는 보지 못하고 있었을까. 따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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