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려는 생각이 들 때면 충족되지 않은 어떤 욕구가 있는지 찾아보세요.
어제의 문장과 함께 이 문장은 내가 정말 원하는 문장이다. 비폭력대화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첫째로 충격적인 관점이다. 이 책이 없이 내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지 생각하면, 가능했을 수는 있었더라도 아마 인생의 후반 초입에나 닿았을 법한 영역일 것 같다. 그 시간적 간극만큼 내가 큰 것을 얻었다는 생각에 고마움이 크다. 이런 것이 바로 책을 읽는 이유가 된다. 이 문장을 다시 들여다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얻는다. 상대 탓으로 돌릴 수도, 내 탓으로 돌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곧 폭력이 되고,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대신, 내가 필요한 게 무엇이었을지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필요를 알아차려주는 것은 이 사회에 정말 중요한 작업이다. 세상은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작업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봐도 충분히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과연 해당되지 않는 게 있을까? 반례를 찾아보는 것도 지금 시점에서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 희소성이 있는 작업일 테니 말이다. 이런 나의 사회에 작동하고 있는 기여의 관점을 설명하려니, 돌아오는 답 중에 하나가 [가짜노동]에서 다뤄진 것처럼 세상에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일이 아닌 것이 많이 존재한다고 언급해 주었다. 일리 있으며, 사실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문제를 위한 문제,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작업 등이 그것을 잘 설명한다.
이 주장에 대해 나는 '필요'의 정의를 확장함으로써 그 주장을 포섭할 수 있다. 그만큼 나는 이 심리적 관점에 있어 깊게 매몰되어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러한 매몰의 원인을 나는 사회적, 경제적 강압에서 적응하지 못해 발생했다고 설명해 왔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이제 그것들을 강압이라고 느끼던 나를 과거로 두게 되는 흐름에 놓여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나는 앞으로의 삶에 좀 더 본격적인 선택이 요구되는 것을 직감한다. 심리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내 몸이 요구하는 무언가에 있어서 그 바닥을 한 번 찍고 다시 올라온 것이다. 보다 넓은 시각에서 다음에 갈 곳이 어딘지 산 정상에 올라 전망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머리는 냉철한 듯했지만 몸은 신생아적 반응을 띄는 상태였다. 당시의 판단으로는 이런 곳도 도달해 보았었다. 내게 있는 두려움 중 하나인, 신앙을 가진다는 것에 한 번 몸을 담가 보려는 시도. 마치 심연에 빠져 보겠다는 듯이 나를 조금 도와주셨던 분께 "만약 제가 이상해졌다면 정신 차리라고 말씀해 주세요." 같은 말을 했었다. 당시에 나는 실행력이 매우 떨어지는 시점이었어서 실상은 시도에 그쳤지만 말이다. 전도사님께 성경공부를 요청해서 출애굽기까지 읽고 이야기를 나눴던 것을 봐서 발가락 하나 정도는 담갔을까 싶다.
지금 시점에 오니 신앙은 내게 있으면서도 없는 그런 무언가가 되었다. 큐비트 같은 상태처럼 말이다. 이런 게 개발이 되었다는 게 내게는 이런 비유가 가능해져서 이점이 생긴다. 중첩 상태처럼, 누군가 나를 관측하기 전에는 내가 보는 나는 랜덤 상태이나 다름없다.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조차 그 답이 항상 기다 아니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때는 이 상태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 자체를 받아들였다. 앞으로의 삶에 나아가면서 받는 자극에 따라 길이 정해질 것이다. 그리고 얽힘 상태처럼 아마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든 조금 아는 사람이든 나를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볼 것이며, 나는 그에 무겁지 않게 응한다. 그러나 반기독교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 볼 때는 그들이 가진 의심에 또한 가볍지 않게 응하니, 아마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기독교인 분 앞에서 나는 기독교인이 되어 드리는 게 가능해져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박쥐 같이 이득을 취하기 위해 어디에 편을 드는 행위만은 아니라고 덧붙여두고 싶다. 그 이유는 내 그동안의 글에서 흩뿌려져 있지만 설명이 충분히 되어 있다.
그다음으로 나는 그다음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나의 필요에 집중하여 그 필요를 채워나갈 것이다. 학문이든, 돈벌이든, 결국 목적이 존재한다. 그 목적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설득한다! 가짜노동도 맞는 말이지만, 이 말도 맞다고 본다. 이 필요야 말로 근원적인 것이며, 사회의 모든 것을 발명하는 원천이라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분업이 효과를 봤지만, 분업만으로 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연구를 접하면서 생소한 표현을 목격하는데, 은폐된 진실을 밝힌다거나, 공백을 메우고자 한다는 표현이 그렇다. 여기에 전제된 것은 실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색하지만, 여기에 적절한 표현이 되는 것 같아서 써보자면, 내 필요를 위해 살아온 삶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발견한 그 방향은 현사회가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필요를 '감각'하긴 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채울 수 있는 수단을 찾지 못했기에 그 작업을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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