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상에 나고 자라면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태생부터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다른 종에 비해 독립된 개체로 서기까지 굉장히 오랜 기간이 걸린다. 이것도 적응을 위해 도입된 뇌 가소성 개념이 연관이 있다고 한다. 적응이라는 표현으로 인간은 수많은 것들을 학습한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옳고 나쁨, 좋고 나쁨의 기준 또한 학습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준을 학습하는 것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학습한다. 보고 따라 함으로써.
보고 따라 하는 학습 방식은 매우 강력하여 생존에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유리한 방식이라고 본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EBS 다큐프라임에서 접한 아이 대상 실험에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소개하는 데, 그중 하나가 아이들은 3세 정도만 되어도 맥락을 파악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1). 이는 곧 판단을 가르는 사회적 기준들을 학습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아이들을 보며 '애가 뭘 알겠어'하는데, 과장 좀 보태서, 아이들이 모르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을 설명할 방법 외에는 없다. 그만큼 사람은 설명하는 법은 배우지 못해도 학습 능력 자체는 대체로 빠르게 올라온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 중에 가장 처음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언행불일치'이다. 보고 배우는 것의 비중이 크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게 일치하는 경우는 보다 적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따라 말할 수 있다.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세계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어른'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마치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알면 어른이 된 거라는 말과 같은 소리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든지, 권선징악과 같은 도덕관에서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아이들의 눈을 폄하하는데, 실제 아이들의 눈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날카롭다.
아이들이야 말로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장 빠르게 파악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어른들의 삶을 보고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게 좋을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을 새로 '학습'하는 것이다. 외모냐 내면이냐 하는 논쟁은 수 세대를 걸쳐 지속되어 오고 있다. 조금 살펴보면 이것은 단순히 내게 필요한 연인의 조건을 다루거나, 사람을 대하는 요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는 요소만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외모에 대한 영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시기에 따라 최고로 잘 생겼다는 대명사가 되는 인물들이 있다. 이 인물들은 얼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을 하는 직업군에 분포되어 있고 분야에 따라 외모에 따른 그 인기의 규모도 달라진다. 외모만으로 타인의 환심을 사는 것을 보게 되고, 외모를 가지고자 한다. 혹은 외모에 마음을 뺏겨 살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는 암묵적으로 그런 외모를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성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꾸밈(화장이나 패션, 몸매 등)을 통해서 "야, 너도 '권력'을 가질 수 있어"라며 부추긴다. 심지어 이런 외모지상주의에 지쳐 내면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들도 결국 결이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면을 가꾸는 것조차 권력을 가지기 위한 꾸밈의 영역에 들어가는 경우가 그렇다.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학'부모의 '교육열'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속을 보면 이 또한 농사짓는 분 사이에서 '어떤 작물이 돈이 많이 됐다' 하면 갑자기 그 작물로 갈아타는 농지가 많아지는 것과 다른 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타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기사들을 접할 때면, 그 한계는 학부모의 교육열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학생의 학구열을 살펴야 할 때이다. 아이들은 모두 학습할 능력을 타고났다. 그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과연 무엇일지 재고해 봐야 하고, 이러한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가 있다. 그렇다고 학부모를 비판하는 게 아니며 존경심을 표한다(농사 지으시는 분들도 정말로 존경합니다.). 단지 그분들조차도 한 때 아이였으며, 그렇게 자란 결과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는' 길을 장인처럼 '고집'할 뿐인 것이다.
문제는 사회 시스템과 문화에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공부를 하다 보니 이러한 고민의 방향은 역사가 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되니, 왜인지 모르게 분노가 흐려지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가 일부러 못하게 막는 게 아니라 몰라서, 못 배워서 그런 거구나 하고 말이다. 과연 어떤 울타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 가족에게, 나에게 이로울지 계속 고민해 나가야 할 것이다.
(1)
https://youtu.be/z2K7hwOIYqI?si=13fSatPZSrpSqn0h&t=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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