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꺼내/글싸기

결국 내가 하기 싫은 거였다.

가랑비 2025. 10. 8. 10:45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렇게 했던 걸까?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슬쩍 피하고, 궁지에 몰려도 안 하고 뻐기는 거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붙이고 '문제'라 여기며 해결을 해버리게 되었다.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성장을 경험했다고 생각했고 결국 여기에 도달해 버렸다. 그냥 하기 싫은 거였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기억력 이슈와 관련해서는 명백한 명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명분을 방패 삼아 이전처럼 살기는 싫다. 문제를 겪고 있다면 해결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해오던 대로 기억력 이슈도 해결하면 그만이다.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하고 있다는 얘기를 남에게 들었다면 당장 튕겨냈을 것이다. 나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내가 온전히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마음껏 해보니 그 차이가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온전히 하고 싶어 하는 것들에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들어서 해봐야 한다. 이렇게 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놓인 상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시도한 것들이 나에게 쌓이는 것이다. 이게 쌓여서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에게 희망을 부여하게 되면서 실제로 할 수 있는 영역에 놓인 것은 많지 않지만, 그것에 비해 할 수'도' 있을 것들로 여겨지는 영역이 확장된다.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여기는 것을 꼭 바꿔야 할까? 그건 아니다. 인생은 살면서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인생은 선택과 집중이 필연적이다.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사회에 의해서 나에 의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형태의 것이 있고,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을 때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환경에서 학습한 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살게 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이미 태어난 곳이 어디냐에 따라 선택과 집중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이냐가 중요하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면 그냥 그러고 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그 간극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이라 함은 흔히 할 수 없는 일로 놓여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이면 꼭 하고 싶다고 여기게 되는 경우는 본능적인 영역인 것 외에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그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버린 것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내버려 두기가 싫어진 것이다. 그래서 도전해왔고 할 수 있는 영역으로 바꿔내는 과정이다.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감각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있음에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니, 마치 구원자를 바라는 것처럼. 비극은 항상 여기에 있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길 바라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 나의 경우 대리만족을 싫어했다. 대리만족은 그것이 곧 내가 되지는 않고 그냥 꿈만 꾸고 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직접 하길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사람을 원했던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지만, 실제로 그렇게 감각했던 게 맞는 것 같다. 

  웃긴 건 그렇게 구원자를 바랐더라도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내 마음을 온전히 편하게 해 주고,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예민하고 이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예민함과 이상적임을 조정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건 애초에 남에게 기대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적당히 타협하는 것도 좋지만 그냥 예민하게 더 연마해서 나만의 것으로 가지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자는 결국 나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나의 부모가 되어왔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그들도 사람이며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세대에서 다른 방식으로 세대를 이어왔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곧이곧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다른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안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부모, 교사, 사회의 역할은 일종의 울타리여야 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나아갈 능력을 길러야 사회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방식들은 내가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과정에서 나오는 산물들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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