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꺼내/파편

가지뻗기

가랑비 2025. 8. 13. 21:27

  나조차도 나를 모르는 걸 넘어 나조차 나를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나의 모습은 매 순간 너무 쉽게 깨지고 흩뿌려져서 보이지 않는 바닥에 있던 것 같다. 수많은 막연함, 막막함을 매 순간 느끼며 두려움과 불안에 긴장하고 있는 삶이 당연한 것이었던 것처럼 살았다. 심지어 의식조차 하지 못해서 내가 힘든 것을 힘든 것인지도 모른 채 살아서 극복한 뒤에서야, '생각해 보니, 나 힘들었던 거구나?'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결론은 나름의 해피엔딩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가지치기가 아닌 가지뻗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한 건, 나도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나는 젖은 빨래가 되어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은 회피뿐이었다. 숙제를 안 해 가면 혼났다. 웃기게도 혼나면 눈물이 났다. 억울했던 모양이다. 대체 왜 억울했을까? 나도 이걸 잘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수많은 좌절 속에 자리 잡은 고장 난 신념들이 나를 가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 억울함에 꿈틀댔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만난 귀인들 덕에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꿈 찾기 프로젝트에서 했던 프로그램들은 전부 나의 숨통을 틔워주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만을 기다리게 된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프로그램들 중, 기억이 선명하게 나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대여섯 명 정도 중에서 몇 명을 선택해 직접 샵에 찾아가 인터뷰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었다. 북촌에서 사진샵을 운영하는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나눴던 대화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나에게 각인된 결과물이 남아있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막연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기계공학과 가야지하던 사람으로서는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언가 두각을 드러냈던 것은 사실상 손재주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재능으로 피어나기에는 너무 손쉽게 잊혀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정교한 작업에 쉽게 몰입했을 뿐이었다.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돈을 벌지 못하는 가치 없는 것이었다. 들리는 말들을 꺾을 논리도, 근거도 없었고, 근거를 만들어 낼 자신도 없었으며, 그럴 힘조차 없었다. 어느 순간 팔과 다리가 없는 듯하고 싶은 것이 생겨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나에게 이 프로그램은 의지를 심어주었다. 내가 원하는 길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의식적으로 각인되지는 못했으나 그 씨앗은 내 속 깊숙이 들어왔던 게 분명하다. 그 사진기사를 앞에 두고 그리고 그날을 마무리하며 돌아가는 길에 내 속에 뿌려졌던 씨앗은, 이 문장이었다.

가지치기가 아니라 가지뻗기를 해야겠구나.

 

  돈이 없어서 못 해. 시간이 없어서 못 해. 그런 건 취미로 해. 그런 건 대학 가서나 해. 그런 건 해서 얻다 쓰려고. 길은 오로지 하나였는데, 나는 멍청하게도 그걸 몰라서, 자꾸 다른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뻗으려는 가지는 이파리 하나 나기도 전에 썰려버렸다. 그렇게 해서 잘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결국 하고 있는 건 시간을 죽이는 일들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회피라는 반항이었다. 하루하루 도망치면서 불안 속에 살면서 지냈다. 신기하게도 나에게 있는 강력한 능력은, 힘든 일을 기억하는 것조차 회피하는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마치 타임루프 속 갇혀있는 것 마냥 하루를 반복했다. 똑같은 불안과 두려움을 겪을 거라는 걸 닥치기 직전에서야 겪는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잠 속에 들어가면 사라지고 기억 또한 그 사라지는 감정들과 함께 떠났다. 

  이런 삶을 살아오던 나에게, 수많은 가지들이 잘려왔던 나에게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처음에나 외부요인으로 가지치기당했던 것이겠지만, 결국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스스로 그 작업을 도맡아 하고 있던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고, 하더라도 가지를 치는 것 또한, 나였음을. 그 순간에라도, '나'가 존재함을 그때 처음 느꼈으리라. 누군가가 그 순간의 나를 보았다면 눈빛이 잠시나마 빛났다고 했으리라. 유리병의 벼룩, 족쇄의 코끼리 보다 한 술 더 떠서, 가지 치던 톱을 내가 이어받아 스스로 그 작업을 반복해 오던 그 짓을 그만두자. 가지를 뻗어야겠다. 가지를 뻗을 수 있도록 내가 나를 놓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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