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쏘기 교육을 할 때, 종종 언급하는 것들이 있다. 누리라고. 동아리에서 제공되는 장비, 교육, 프로그램들,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 자연과 낭만을, 활터에 계신 좋은 접장님들의 환영과 챙김을 누리라고 말한다. 물론 이걸 내가 누리듯 온전히 누리기엔 장벽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장벽을 걷어서 보여주는 역할을 내가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누린 게 너무나도 감사해서 이걸 또 누릴 수 있도록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뿐이다. 이 좋은 걸 나만 알고 있기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과연 마음이 마냥 착해서 이런 게 가능했을 거라 생각했다면 정말 큰 오산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 만큼, 보이는 것 만큼의 일부분도 마음이 넓지 못하다. 오히려 속이 진짜 콩알떼기만큼 하려나 싶다. 그럼에도 나는 인성이 좋고 싶었다. 그래서 내 속의 것들을 갈고 닦았다고 볼 수도 있고, 뿌리 째 뽑아서 탈탈 털어서 솎고 다시 심은 것 같기도 하고, 잘게 다져서 뭉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한 가지 좋은 소식이라고 볼 수 있는 게 있다면,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일 뿐이다. 내 속에 수많은 생각들, 수많은 기분들이 모두 현존하는 것이며,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말들을 꺼낼 수 있음은 이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예전엔 이런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기에 슬펐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 도달한 게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만 해도 내 속은 온갖 잡념들이 터져나와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은 그 잡념들이 내 마음 속 크기에 비해 작아졌음을 느낀 것이 맞다. 그래서 그 잡념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 하다. 이제는 이런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겠다. 비율이 적정하게 있다고 느끼고, 그 비율을 내가 어느 정도 조율을 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안심시킨다. 어찌보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만, 그 과정에서 내가 실질적으로 변화를 겪어서 나의 모습으로 삼아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과정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누리고 있다. 요즈음 나는 행복에 겨웠다. 매 순간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함께 한다. 나이에 맞지 않게 책임감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검열한다. 더 쥐어짜내서 나를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는 건지 하는 등 말이다. 하지만 누릴 수 있는 만큼 누리고자 한다. 지금껏 나를 살게 해왔던 것은, 이런 기쁨, 즐거움, 행복감, 만족감, 충만함, 이런 감정, 감각들을 느낄 수 있던 것 덕택이다. 그 힘으로 나는 지금껏 살아왔다. 누린다. 누린만큼 살 수 있다. 이기적이다. 이것 만큼은 양보하기 어렵다.
그 대신 기쁨과 감사 그리고 즐거움 등의 것들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어 누린다. 그게 내가 양보하지 않겠다는 근거가 된다. 누구는 숨 쉬는 듯 당연한 것이어서 눈치 채지 못하는 것조차 나는 찾아내서 누린다. 그 사소한 누림이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으로 쌓인다. 근 한 두 달 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행복에 겨웠다. 덕분에 나의 행복함 레이더의 발전을 이룩했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마주했던 영화, 1900의 전설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대사가 맴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야.
이 문장은 이상하게 뇌리에 박혀 여지껏 나를 따라다닌다. 이해해 주는 친구라고 느낀 분들이 여럿 있어 왔기에 내가 지금껏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조잡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해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될 정도의 감각을 느낀다. 아, 이게 진짜 '공감'인가보다. 누렸다. 이 만족감으로 다음 1년의 각오를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한다. 아, 이거구나. 나를 살게 하는 게 이런 거구나. '포기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한 뼘 더 늘었다. 누린만큼 살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