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2021. 1. 12. 12:31

  사람은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적어도 '나'라는 사람은 그렇다. '세상 사는 게 왜 이리 어지러울까'하고 세상이 뿌옇게 보이던 때에 한 시를 만나 차분히 가라앉아 맑아졌다.

 

곡식 넉넉한 집엔 먹을 사람 없는데

자식 많은 집에서는 굶주림을 걱정하네.

 

  정약용의 '혼자 웃는 이유'라는 시의 첫 두 행의 내용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복잡한 거라고 생각은 했어도 세상만큼은 아직 내 이상향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 시가 그 생각을 다잡아줬다. 지금 이 세상도 사람이 만든 것이고 복잡한 존재가 모여 만들어진 게 단순하긴 어렵겠다. 대신, 희망을 품는다. 나를 가꾸고, 남에게 베풀고, 서로 돕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 

 

  이전 글 후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후회를 그대로 두지 않고 내 삶의 원동력으로 만들었다. 이제 보니 이것이 '도전'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들어오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부딪히면서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더 많은 생각을 얻어 나의 세계를 조금씩이나마 넓힐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물이 바로 '개선'이었다. 생각이 많았던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이상적인 그림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준비가 부족한 채 시작해야 했고, 좌절을 느꼈다. 실망, 좌절 등을 느끼면 굉장히 아프다. 아프기 싫어서 기대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오랜 세월 기대하는 것을 하지 않으며 살았다. 언젠가부턴 부작용을 깨닫게 돼서 과도한 해결책이었다는 점을 느꼈다. 기대하는 것의 장점을 생각했고 다시 기대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당장 내 앞에 놓인 것 중에 놓치면 후회할 것 같은 것을 먼저 잡았다. 동시에 무엇이 내 삶에, 나에게 진짜 좋은 건지 고민했다. 고민의 최종 목적지는 항상 '나'였고 내 '삶'이었다. 아무리 기대하길 그만뒀어도 나의 '이상'만큼은 놓을 수 없었나 보다. 

 

  지치고 다 내려놓고 쓰러지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항상 내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분명 저기 어디쯤에 길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는지 결국 다시 일어나게 됐다. 길을 잃고 주저앉을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앞을 바라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욕구였다.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 멋진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욕구였다. 가만 보니 내 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두 가지 욕구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이라는 말로 '내 이상은 접어두고 당장 돈 벌 궁리나 하라'는 말 때문에 길을 잃은 것뿐이었던 것 같다. 정말 듣기 싫은 '조언'이었지만 정말 중요한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느낀 점은 순서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일단 돈부터 편하게 벌 수 있는 좋은 직장, 좋은 직장 가기 위해 좋은 대학, 좋은 대학 가기 위해 공부를 요구당한다. 결국 다 돈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를 힘들게 했던 거구나. 

  중3 될 때, '고등학교 가면 공부하느라 시간 없다는데 한 번 반장 해봐야지.'하고 손을 쭈뼛쭈뼛 들었다. 그렇게 손을 들 수 있었던 것도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장이 돼서 특별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반장을 해보고 싶은 것이었지 뭔가 이뤄내고 싶다는 생각은 못 해봤던 것이다. 단지 반 아이들이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혼자 있는 친구에게 한 번이라도 더 다가가는 것뿐이었다. 고2 될 때도 똑같이 '고3 되면 진짜 공부만 해야겠지. 이번에도 뭐라도 해보게 반장해 도전해봐야지.' 이번에도 우연히 원하는 사람이 없었어서 반장이 됐었다. 이 때도 마찬가지로 나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똑같이 소외되는 이가 없게 말이라도 한 번 더 걸어보는 것뿐이었다. 당장 내 머리 속도 복잡해 타버린 상태인데 나한테 남아있는 것은 남들이 그렇게 버리라던 '이상'만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중도'였다. 현실과 이상이 부딪히는 상황에 필요한 것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둘의 합의점 '절충안'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이렇게 나는 모든 일에 상황을 최대한 고려하여 적당한 지점을 찾고, 그 길로 밀고 나갔다. 처음엔 정말 이도 저도 아닌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회색분자라는 표현을 들었었는데 마치 그런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백논리는 더욱 싫었다. 다행히 그렇게 2년, 3년, 쭉 세월을 살다 보니 선택지가 구체적이고 다양해지면서 절충을 찾는 게 수월해지기 시작했다. 기준이 확고 해지면서 회색분자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있게 됐다. 불교는 아니지만 중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길을 좇는 중재자 같은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됐다. 

  하나의 씨앗이 심어지면서 파생된 열매들이 자라 내 삶에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된다. 물론, 허점이 있거나 잘못된 씨앗이나 열매는 없앤다. 늦은 때라는 것은 없다. 발견 즉시 제거할 수 있도록 한다. 그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뤄져서 나에게 '납득'이라는 과정으로 다가오는데 한 번 납득된 사항에 대해서는 깊게 남는다. 마치 수학 같은 논리 과정에서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해 공식이 나오는 과정까지를 납득한다면, 즉 '이해'한다면 오래 기억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나의 개선의 노력이 체득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였던 것 같다. 내 삶의 전체가 개선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나 다름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상이었다. 단순히 그게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나도 엉망진창, 세상도 요지경이다. 하지만 삶은 한 번 사는 것이고, 이상에 다가가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멋지게 살겠다는데 좌절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 내 두 번째 좌우명인 개선 하자. 문제 인식, 실마리 찾기, 해결책 만들기, 체득하기의 과정을 거쳐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 하나 둘 '개선'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나는 성장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년이면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이게 나를 실험해서 얻은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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